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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에 선 지속가능성 공시
서울경제 기고 박일준 상근부회장 현대 기업 기후변화 대응 등 정보 제공 로드맵 조속 발표 불확실성 줄이고 또다른 규제 안되도록 면책조항 필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표현 중 ‘개와 늑대의 시간’이 있다. 해가 저물 무렵 다가오는 존재가 익숙한 개인지, 위협적인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을 뜻한다. 지속 가능성 공시 제도 도입을 둘러싼 오늘날의 우리나라 상황도 이와 닮아 있다. 기업에 지속 가능성 공시는 새로운 부담이 될 수도, 미래 경쟁력을 키우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관건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준비시키며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그간 기업은 재무 정보 중심의 공시에 익숙해 왔다. 그러나 이제 기후변화 대응, 공급망 인권, 지배구조 등 비재무 요소가 기업 가치와 직결되는 시대가 됐다. 투자자는 재무제표만으로 기업의 지속 가능성 관련 위험과 기회를 충분히 판단하기 어렵다. 지속 가능성 공시는 그 간극을 메우는 장치다.
글로벌 자본시장은 이미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등 주요국은 지속 가능성 공시를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앞두고 있다. 이제 지속 가능성 공시는 선택이 아니라 ‘공통 언어’가 됐다.
우리 기업도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외 공급망과 글로벌 투자자는 이미 한국 기업에도 같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지난 몇 년간 시행 시기와 대상조차 명확히 정하지 못한 채 논의만 반복하면서 기업들에 혼란을 안겼다. 불확실성은 곧 비용이다.
우리는 유럽의 경험에서 배울 점이 있다. EU는 2014년부터 약 10년 동안 지속 가능성 공시를 준비해 오면서 기업이 공시 역량을 점진적으로 쌓을 수 있는 시간을 줬고 산업 현장의 목소리도 반영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유럽이 기업에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준 것처럼 우리도 명확한 로드맵을 조속히 발표해 불확실성을 해소하되 실제 시행까지는 기업들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더 나아가 지속 가능성 공시가 ‘또 하나의 규제’가 아니라 자본시장의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고 기업의 중장기 전략을 점검하는 장치로 작동하려면 규모별·업종별 특성을 반영한 단계적 적용, 핵심 지표 중심의 접근, 그리고 초기 시행착오를 고려한 합리적 면책 조항도 함께 제시돼야 한다.
특히 기업 규모별 대응 역량의 차이를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 대기업과 달리 중소·중견기업들은 공시 준비에 필요한 데이터 수집이나 공시에 대응할 전문 인력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우리 기업들이 지속 가능성 공시 제도에 연착륙하고 글로벌 경쟁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실질적인 정부 지원이 함께 마련될 필요가 있다.
‘무늬만 환경·사회·지배구조(ESG)’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공시의 신뢰성과 지속 가능 경영의 내재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기업의 공시 부담 해소와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마중물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 설계와 함께 데이터 플랫폼 구축, 전문 인력 양성, 중소기업 맞춤형 교육·컨설팅 등 기업의 실행 역량을 높이는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이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걷어낼 선택의 순간이다. 규제는 최소화하되 공시 품질은 높이고, 기업 부담은 줄이되 정책 효과는 극대화하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지속 가능성 공시를 어떻게 설계하고 활용하느냐가 한국 자본시장과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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